해외 출판을 준비하는 작가님들의 원고를 보다 보면, 꼭 번역가를 괴롭히는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바로 ‘오빠’입니다. 도대체 이걸 뭐라고 옮겨야 할까요?
사전을 폅니다. ‘Brother’, ‘Older brother’.
틀린 말은 아닙니다. 생물학적으로는 맞죠.
그런데 소설에서 여주인공이 썸 타는 남자한테 “오빠, 나 이거 사줘잉” 하고 애교 부리는 장면을 생각해봅시다. 이걸 “Older brother, buy me this”라고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요?
갑자기 가족 드라마 분위기가 됩니다. 그것도 아주 딱딱하고 엄격한. 로맨스 텐션은 다 날아가고, 족보 따지는 느낌만 남습니다.
반대로 친한 선배라서 “오빠”라고 불렀는데, 이걸 “Honey”나 “Darling”으로 번역하면? 멀쩡한 선후배 사이가 순식간에 불륜이나 오해 살 만한 끈적한 관계로 변질됩니다.
한국어의 호칭에는 관계의 깊이, 나이 차이, 친밀도, 심지어 은근한 작업 멘트까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복잡 미묘한 뉘앙스를 영어 단어 하나로 퉁친다?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필요한 게 발상의 전환입니다.
이 순간, 우리는 ‘번역가’가 아니라 ‘연출가’가 되어야 합니다.
번역은 A라는 단어를 B라는 단어로 바꾸는 작업입니다. 하지만 소설 번역, 특히 문화적 맥락이 강한 호칭 번역은 다릅니다. 그 장면의 ‘분위기’와 두 사람의 ‘관계’를 외국 독자에게 납득시키는 연출 작업입니다.
그럼 어떻게 연출해야 할까요?
첫째, 그냥 ‘Oppa’라고 씁니다.
요즘 K-드라마 덕분에 ‘Oppa’는 거의 고유명사처럼 됐습니다. 로맨스 장르 주 독자층은 이미 이 단어의 뉘앙스를 압니다. 어설픈 영어로 바꾸는 것보다 원어 그대로 살리고, 문맥으로 이해하게 두는 게 나을 때가 많습니다.
만약 이 단어가 낯설 독자들이 걱정된다면, 맨 처음 등장할 때 이렇게 주석을 달아주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Oppa: A term used by women to address an older brother or boyfriend.
(오빠: 여성이 손위 남자 형제 혹은 남자친구를 부를 때 쓰는 호칭)
둘째, 호칭을 버리고 이름을 부르게 합니다.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영어권에서는 나이 차이가 나도 이름 부르는 게 자연스러우니까요. 한국적인 위계질서는 좀 사라지지만, 오독의 여지는 확 줄어듭니다.
셋째, 오빠라는 단어가 쓰인 맥락을 ‘지문’으로 연출하는 겁니다.
‘오빠’라는 단어 하나에 집착하지 말고, 그 단어를 뱉을 때의 태도를 묘사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원문) “오빠, 오늘 좀 멋있다?”
이걸 그냥 번역하면 “You look cool today, brother.” 정도겠죠.
이걸 연출가가 되어 다듬으면 이렇게 됩니다.
(연출 번역) “You look good today,” she said, stretching the last vowel playfully like she always did when she wanted something from an older guy.
(오늘 멋있네, 그녀가 말했다. 연상의 남자에게 뭔가 원할 때 늘 그렇듯 말꼬리를 장난스럽게 늘이며.)
‘오빠’라는 단어는 없지만, 한국 독자가 느끼는 그 ‘오빠 부르는 느낌’을 영어 문장 속에 녹여내는 겁니다.
해외 독자는 한국의 호칭 문화를 모릅니다.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니 단어 대 단어로 씨름하지 마세요. 그 장면에서 두 사람이 어떤 눈빛을 주고받는지, 이 호칭이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건지 아니면 선을 긋는 건지.
그 ‘공기’를 번역하세요. 그게 연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