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책 쓰기, 전문 용어는 어디까지 풀어야 할까

의사가 책을 쓸 때 가장 자주 멈추는 자리가 있습니다. 용어입니다. 진단명을 그대로 쓸지, 풀어 쓸지. 수치를 넣을지, 뺄지. 기전을 설명할지, 결과만 말할지. 이 판단 하나가 흔들리면 원고 전체가 흔들립니다.
전문 용어를 일반 언어로 바꾸는 일은 어려운 말을 쉬운 말로 교체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낼지, 어디까지 설명하고 어디서 멈출지를 결정하는 편집 판단입니다.
용어를 바꾸기 전에 먼저 정해야 할 것
독자가 누구인지를 먼저 정해야 합니다. 동료 의사를 위한 글과 환자 가족을 위한 에세이는 같은 소재를 다루더라도 언어 자체가 달라지거든요.
독자를 정하고 나면 판단 기준은 하나로 좁혀집니다. 이 독자가 이 단어를 보고 곧바로 이해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손을 대야 합니다. 이 기준이 없는 상태로 원고를 쓰면, 용어 하나마다 다시 고민하게 되고 결국 어느 챕터는 쉽고 어느 챕터는 어려운 글이 됩니다.
원어를 그대로 써야 하는 세 가지 경우
모든 전문 용어를 풀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 세 경우는 원어를 유지하는 쪽이 오히려 낫습니다.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단어일 때입니다. 고혈압, 당뇨, 위암 같은 단어는 일반 독자에게도 익숙합니다. 이런 단어를 굳이 풀어 쓰면 글이 오히려 어색해지고 거리감이 생깁니다.
용어를 쓰고 바로 다음 문장에서 설명이 따라올 때입니다. 심근경색이라는 단어를 먼저 쓰고, “심장 근육이 피를 공급받지 못해 괴사하는 상태”라는 설명을 곧바로 붙이는 방식입니다. 독자는 용어를 읽으면서 동시에 배웁니다.
용어 자체가 책의 핵심 주제일 때입니다. 특정 질환을 정면으로 다루는 책이라면, 그 질환명을 정확하게 쓰는 것이 오히려 신뢰를 만듭니다.
반드시 바꿔야 하는 세 가지 경우
반대로 다음 세 경우는 독자 언어로 옮겨야 합니다.
이 단어를 모르면 다음 문단이 통째로 끊기는 핵심 개념일 때입니다. 용어를 그대로 두고 넘어가면 독자는 모른 채로 계속 읽거나, 책을 덮습니다.
용어가 감정적 거리를 만들 때입니다. 의사에게는 “예후가 불량하다”가 익숙한 표현이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낯설고 차갑게 들립니다. “병의 진행을 막기 어려운 상태”처럼, 같은 의미를 담으면서 환자 입장에서 읽히는 표현으로 바꿔야 합니다.
같은 개념을 설명하는 더 구체적인 일상 언어가 있을 때입니다. “혈당 조절 실패”보다 “식사 후 혈당이 급격히 오르고 내려가는 상태”가 독자에게 더 많은 정보를 줍니다. 정확도를 약간 내려놓더라도 이해도를 높이는 쪽이 맞을 때가 있습니다.
수치는 비율이 아니라 사람 수로
의학 글에는 수치가 자주 나옵니다. 생존율, 재발률, 발병률. 그런데 비율을 그대로 나열하면 독자는 그 숫자가 자기 일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5년 생존율 68퍼센트”라는 표현보다 “치료받은 사람 100명 가운데 68명이 5년 뒤에도 생존했다는 뜻입니다”처럼 풀어 쓰는 쪽이 독자에게 더 잘 닿습니다. 다만 이 변환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생존율은 특정 병기, 특정 연령대, 특정 시점의 추적 결과를 평균 낸 통계치입니다. 인원수로 바꿔 말하는 순간 “내가 아는 환자 100명 중 68명이 살아 있었다”는 식의 실측처럼 들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숫자를 풀어 쓴 다음에는 짧게 조건을 붙여야 합니다. “이 수치는 3기 환자를 기준으로 한 평균치입니다” 같은 한 줄이, 독자가 통계를 자기 상황에 그대로 대입하는 오해를 막습니다. 단순화는 이해를 돕는 도구이지, 정확성을 포기하는 핑계가 아닙니다.
기전 설명은 두 조건에서만
의사가 책을 쓸 때 또 하나 막히는 지점은 기전, 즉 작동 원리를 얼마나 설명할 것인가입니다.
기전 설명이 글의 전문성을 높이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일반 독자는 “왜 이렇게 되는지”보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먼저 궁금해합니다.
기전을 넣어야 하는 경우는 두 가지뿐입니다. 독자가 결론을 받아들이려면 배경 설명이 꼭 필요한 경우, 그리고 기전을 알면 독자가 자기 상황에 직접 적용할 수 있는 경우입니다. 이 두 조건에 해당하지 않으면 기전은 과감히 줄이는 편이 낫습니다.
용어를 바꿀 때 자주 무너지는 세 지점
지나치게 쉽게 만드는 경우입니다. 전문성을 지우려다 보면 글이 밋밋해집니다. 독자는 의사의 글에서 전문가의 판단과 경험을 기대합니다. 용어를 바꾸더라도 그 판단의 무게까지 희석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설명을 과하게 붙이는 경우입니다. 용어 하나를 바꾸면서 두 단락 분량의 부연을 달면 글의 흐름이 끊깁니다. 한 문장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설명은 본문 대신 각주나 별도 박스로 빼는 것이 낫습니다.
같은 개념을 다르게 표현하는 경우입니다. 앞에서는 “심부전”이라 쓰고 뒤에서는 “심장이 제대로 펌프질을 못 하는 상태”라고 쓰면, 독자는 이 둘이 같은 것인지 헷갈립니다. 한 권의 책 안에서는 같은 개념을 같은 방식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번역이 아니라 편집입니다
전문 용어를 일반 언어로 바꾸는 작업은 단어 대 단어의 교체가 아닙니다. 독자가 이 글에서 무엇을 이해하고, 어떤 경험을 하길 바라는가를 기준으로 삼는 편집 작업입니다.
의사가 가진 지식과 경험의 깊이는 언어를 단순하게 만든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복잡한 것을 정확하게, 그러면서도 독자가 따라올 수 있게 말하는 능력이 오히려 신뢰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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